게으름 피우는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갔고 또 많은 일들이 생겼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들로 채워진다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을 겪으며 기억이 좀 흩어지긴 했어도 이전에 썼던 후기들 꺼냈고, 석진 트릿 - 석준 필립 형제 얘기를 조금 되살려 냈다. 이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정리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만큼 말이 길어지긴 했지만 결국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반드시 다시 만나고 싶으니까 최석진 현석준 둘 다 다음에 건강하게 꼭 돌아와들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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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진 현석준은 이전부터 이른바 '같극같캐' 길을 꽤 많이 걸었다. 시즌이 달랐어도 최후진술 윌리엄이 있었고 현석준은 배역 바뀌긴 했지만 해적 초연 앤 루이스로 캐스팅되었다가 실제 앤 루이스로 무대에 선 적도 있으니 이것도 포함해야겠지. 최근 엔딩노트 에디와 더 테일의 존. 닮은 얼굴은 아닌데도 같은 캐릭터 속성이 보이나? 가볍게 넘겼다가 처음으로 같은 무대에 트릿과 필립으로 올라오길래 이것도 되네? 했지. 그리고 왜 이 둘이 같캐 길을 걸었는지 오펀스에 와서야 둘이 함께 선 무대를 보고 알았다. 이 집 이란성 쌍둥이네. 오펀스 원작 설정에서의 트릿과 필립 사이엔 분명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이쪽 페어는 처음 뵙겠습니다 하자마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란성 쌍둥이라 내 머리가 인식을 해 버리는걸.

 



둘 다 배우들의 실제 나이 대비 무대 인물이 어린 역할에 어울리는 면이 있고 (어려 보이는 면모랄까) 키도 비슷해서인지 이 둘이 집 안에 있으니 석진 트릿이 한 15분 먼저 태어나 놓고 그 때 너는 어린 아기였다고! 내가 형이라고!! 큰소리치고 투닥대며 지냈을 애들로 보이지 뭔가. 개인적인 취향에 꽂힌 부분이라 조금 장면을 당겨서 얘기하자면 1막 후반부에서 해롤드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사를 언급할 때 (쥐와 인간이 펼치는 최고의 계략~!) 중간에 해롤드 있고 왼쪽에는 석준 윌리엄 오른쪽에는 석진 윌리엄 서 있는 구도가 되다 보니 혼자 괜히 저기 해롤드 지금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셨는데여… 이러면서 흐뭇해하기도 했고.

그리고 키와 전체적인 체구가 비슷하다는 이유 만으로도 페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이미지가 있구나-도 알았으며. 2막에서 둘이 해롤드의 스포 장면 앞뒤로 헉헉대며 바닥 이쪽 저쪽에 주저앉아 있는 걸 보면 그 앉은 자세마저도 비슷해서 이러니까 쌍둥이, 마음 속 확신을 다시 한 번 굳히기도 했으니.

이번 오펀스에선 스스로 구축한 pre-history를 강하게 드러내는 배우들이 있었는데 석진 석준도 각자 설정한 pre-history가 있고 이걸 페어에 맞추어 조금씩 조율해 둔 변화를 볼 수 있기도 했다. 이 페어로 들어오면 석진 트릿 석준 필립은 이란성 쌍둥이인데도 석진 트릿[만] 엄마가 죽는 걸 눈 앞에서 직접 봤고 엄마가 동생 잘 챙겨라 둘이 떨어지면 안 돼- 같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곤 했다. 어릴 때는 이란성이라 석진 트릿이 석준 필립보다 조금 더 큰 몸집이었을지도 모르잖아. 그 상태로 고착된 채 시간은 집 안에 고여있게 되었고. 둘 다 꼬맹이들인 건 마찬가지인데도 석진 트릿이 혼자 삶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게 된 계기가 이야기 시작하기 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다는 느낌. 그러나 석준 필립은 밖에 나가지 말라 했지만 의외로 혼자 바깥 좀 돌아다녀봤을 아이였어서 어딘가에서는 삐걱대는 조각들이 나오고 있었을 게다.

그 상태를 머리에 입력하고 났더니 이 페어 회차가 적긴 했지만 회차 두 번 만에 작품 전체를 이어주는, 거듭되는 '게임의 방식' 도 보게 되었었다. 재밌는 놀이~ 를 외치며 집 안을 뛰고 트릿을 잡기 위해 필립이 달리는 술래잡기가 그 시작점. 이게 첫 번째 게임. 대개의 경우 트릿이 이겼을 듯. 페어막에선 트릿이 잡힐 뻔 하기도 했지만 트릿이 귀가할 때 쯤이면 필립이 옷장 안에 숨어서 형을 놀래킬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트릿이 추임새로 변형해서 넣던 옷장 속에 '서' 있을 필립이 그려지잖아. 조금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소년이었으면 좋았겠다- 하는 건 객석 관객 하나의 옅은 소망이었지만.

이 '게임'은 '서로 뻔히 알지만 속아 넘어가는 척 하는' 필립의 책과 신문에 한 번 걸리게 된다. 필립은 글을 읽을 줄 안다. 그걸 트릿도 알고 있고. 필립조차도 형이 모르리라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필립의 pre-history로 '트릿이 깨서는 안 되는, 모르는 척 해줘야 하는 필립의 영역'이 암묵적으로 잡혀 있지 않았을까. 단지 트릿은 자신의 기분 고저에 따라 그 영역을 조금씩 건드려 동생을 자극했을테고 이런 패턴 자체가 시간이 고여버린 집 안에서 꽤 오래 반복되어 왔으리라는 과거사를 읽어내게 만든다.

그리고 이들의 이 두 번째 게임은 '들키지 않기로 했잖아' 에 해당할 [신문에 그은 밑줄]을 트릿이 보는 데에서 시작한다. 불문법에 가까운 규칙을 위반한 데 대한 일종의 벌칙. 필립이 신문 건네주고서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 부엌 쪽 식탁에 올라가 등 돌리고 서 있으면 (나가서 같은 신문 하나를 다른 집에서 훔쳐왔다든가 폐지를 주워 와서 밑줄을 그었거나 했을텐데 깜빡했는지도) 트릿이 어라 선 넘었네? 라서 화를 내게 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 페어에서만큼은 이 부분에서 혼나는 건 필립이 각오했을 영역에 들어간다. 이 페어는 트릿이 하룻강아지처럼 깡깡대서 어딘가 하찮아보이기도 하고 일상이 항상 이런 식이라 필립도 트릿을 그렇게 무서워하거나 트릿의 고함에 위축되지 않았기 때문. 그건 서로 만만한 구석, 혹은 규칙으로 통제되는 영역을 의미하기도 했어서.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게 말이 될 리가 있나. 험프리 보가트 닮은 외부의 침입자라니. 침입자가 있었대도 그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 굳이 하는 일이 책과 신문에 밑줄 긋기라니. 그걸 서로 뻔히 알면서도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잡아오라, 하는 건 규칙 위반에 대한 이 형제의 벌칙 수행 과정이 되겠어서.

거기서 필립이 팔에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는 건 조금 과격한 화해의 방법. 석진 트릿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소년이었기 때문. 다치면 형이 챙겨줄 테니까. 그건 이 형제의 기본에 깔려 있는 신뢰.

 



'이 트릿 형님이 너를 보살펴 줄 거야' '난 늘 널 잘 보살폈어'
각자 캐릭터 포스터의 키워드로 삼은 대사는 모두 트릿의 대사이긴 했지만 결국은 형제 간 신뢰의 교환이었을지도. 석준 필립이 왜 트릿의 대사를 가져왔을까 처음에는 한참 의문이었는데 난 늘 널 잘 보살펴 왔어- 라는 말은 필립이 트릿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 되어 석준 필립 노선이 잡혀가는 키워드가 되어 주었다.

석진 석준 페어 1막에서 과산화수소수 들고 있는 장면 애드립이었음에도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으로 들어간 건 
자연스러운 2.5차전. 엉겁결에 형의 배때지를 운동화 신은 발바닥으로 밀어내는 석준 필립 디테일이 우연하게 처음 시작되었던 날은 어 사고쳤다- 현실의 석준과 석진이 잠시 어른대다 넘어가기도 했고. 암전 될 때 까지의 이 난동과도 같은 애드립 구간 몇 초 안 되었지만 정말로 사랑했었다. 이 부분 대본 없었으면 난리도 아니었겠지 매 번 상상할 수 있게 해준 암전이기도 핬다만. 그래도 아 불 좀 끄지 말아봐여!!!

트릿이 집을 비운 사이 필립은 Pricing Is Right 마냥 해롤드가 재갈 물고 지르는 소리 맞추기 쇼를 하고. 이 또한 석준 필립에겐 게임의 하나였겠지. 시즌 초반에는 없던 디테일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필립과 게임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의 등장'이기도 해서.

석진 트릿이 해롤드를 불편해 하는 건 이 형제 관계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어온 존재여서- 아니었을까. 그건 관객과의 대화에서 배우가 설명했던 것처럼 '보스' 자리를 빼앗기는 데에서 나오는 불안감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고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동생이 타인에게서 더 나은 지원과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눈 앞에서 봐야 하는 스트레스였을지도. '상실'을 대면해야만 했던 적이 있는 트릿이라서? 그런 건 원하지 않아도 닥쳐오기 때문에?

그게 필립을 집 안에 둬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는 점이 이 형제가 드러내지 못했던 혹은 인식하지 못했을 문제 중 하나 아니었을까. 더더군다나 석준 필립은 혼자서도 집 밖으로 나가본 경험이 꽤 많이 드러나는 아이임과 동시에 (창문으로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봐서는 나올 수 없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1막에서 풀리는 걸 들으면 : 아무리 매의 눈이라도 지나가는 남녀의 시계가 무엇인지  아이들을 데려가는 남자가 어떤 영화를 보러 가는지- 그게 인디아나 존스 '1편'-2편이 나와서 1편이 된-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할까. 그리고 집 안의 책은 어디서 나왔을까. 있는 책도 없애버렸을 트릿이 가져왔을 리는 없을텐데.) 집 안에 둘 수 만은 없는 아이이기도 했고 2막 초반에선 해롤드의 홈스쿨링을 통해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하니까.

이건 참 서글픈 측면이기도 하다. '더' 나은 환경은 그 상태를 아는 사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치인데 트릿은 정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왔지만 좋은 것 더 좋은 것을 주고 누릴 수 있는 지식과 경험치가 부족한 아이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니까, 트릿'도' 아이라서 애정이 필요했는데 스스로 지고 있던 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고 상처 투성이였다는 점을 (해롤드와) 객석 만이 알고 있으니까.

석진과 석준은 2막에서 트릿과 필립의 관계가 역전되어 가는 과정도 무척 잘 보이는 쌍둥이였다. 필립은 해롤드를 받아들이며 자신이 알고 싶었던 세상을 흡수하고 시야각을 넓혀 가지만 트릿은 갖고 있는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해롤드를 거부하며 조금씩 다른 차이를 만들어 가는지라. 필립이 보던 가로등의 별빛을 트릿도 알았으면 좋을텐데- 역시 객석에서 이 인물들을 보며 가져가는 마음일 뿐 무엇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해롤드를 찾고 해롤드에게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필립, 그리고 그 상황을 보는 내내 소외된 심정이 드러나던 트릿. 트릿이 사온 마요네즈를 '이제 더 이상 내 입맛 아니야' 거절하는 필립. 그건 형제가 내내 둘 만의 규칙으로 가져가고 있던 게임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점.

이런 관점으로 보면 버스 장면은 외부자인 해롤드가 심판 보는 타이틀 매치는 그 간 해왔던 게임들 중 가장 큰 게임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1막 초반과는 다르게 필립이 이긴다. 석진 석준은 트릿과 필립 사이에 오가는 수많은 투닥거림을 이어지고 연결되는 게임으로 만들어 간 페어이기도 했지만 진짜로 필립이 이겼을 때, 또 많은 게 바뀌는 순간이 바로 보이기도 했어서.

그러나 이 변화를 알아챌 짬도 없이 트릿도 발작과 공황 증세가 있는 아픈 아이였다는 (자신도 몰랐을)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후르륵 유야무야 넘어가 버린다. 그 다음에 필립이 해롤드를 따라 외출한 줄도 모르는 채 돌아온 트릿이 소파에 숨겨진 책을 찾아내고 바로 성질내려다 다시 게임의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쿠션에 다시 집어 넣는 행동도 어떤 면에선 상황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이전의 규칙을 유지하며 게임을 계속해 가고 싶은, 이전 상태 그대로 돌아가거나 이어가고 싶은 트릿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1막에서는 핑계로 수용했던 험프리 보가트와 그에 얽힌 거짓말들을 먼저 부순 건 트릿. 거기에 이전같으면 다른 이유를 추가해서 게임을 이어갔을 필립이 '게임 끝났어/ 형이 술래야' 로 아예 이야기를 틀어버리고- 트릿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게임도 끝나고 관계가 깨져 나간다. 그 깨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방식조차도 트릿 필립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해롤드의 죽음을 통해서였지만.

이 페어를 보면서 '교감'을 많이 느꼈었다. 신발 끈을 묶어주는 트릿이 그런 형을 바라보는 필립이 그리고 해롤드를 앞에 두고 울며 웃으며 춤추는 트릿과 필립을 이전 시즌들과 좀 다른 마음으로 볼 수 있었고. 이들은 내 마음 속에선 언제나 이란성 쌍둥이였으니까.
 
이란성 쌍둥이라는 건 천사의 날개와도 같아서. 혼자서는 날 수 없다. 담장 너머로 날아가기 위해서라도, 양 쪽의 날개를 같이 펼칠 수 있게 되기까지 한 번은 깨졌다가 재구성되어야 했던 내 마음 속의 형제들. 이 페어를 볼 때 느꼈던 애틋함이란 2막 끝에서 이제는 함께 걷자 함께 가자- 말로 직접 하지 않아도 필립이 그 뜻을 건네고 트릿도 받는 마음이 들려서 이기도 했고. 상대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인상이긴 했지만 암시적인 폭력도 약한 편이다 했었고 게임의 파트너라는 건 한 쪽이 일방적으로 강해서만은 되는 게 아니니까 필립도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아이- 라는 흐름으로 이어져서 보는 내내 불편함이 덜하기도 했다. 뭘 하든 둘 다 쪼무래기들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의외로 크게 작용했을 수도 있다?

2022년 - 2023년 시즌의 오펀스 보면서 해롤드 만큼이나 형제들의 관계가 눈에 들어 왔던 건 트릿과 필립 배우들의 시선도 무게도 그 방향에 주어져서였겠지만. 2막에서 게임의 끝이 굳이 짐짓 속이고 속는 척 하지 않는 형제들의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졌다는 객석의 결론을 내며 현실의 무게를 문제를 바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 해도 함께 지고 가보자- 결말로 봐서였고 그건 이 페어를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으니. 이야기가 끝나도 이어질 이 형제들의 삶에서 이제는 더 이상 게임의 규칙이 필요하진 않거나 새로운, 이전에 비하면 좀 더 발전된 규칙으로 생을 꾸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전에 없던 바램을 덧달아 봤었다.

이번 오펀스 삼연 내내, 배우들의 연기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겠으나 눈에 보이는 이야기의 전과 후를 무척 많이 그려볼 수 있었다. 이야기의 이전에도 이 아이들이 살고 있었고 이 이야기가 끝나도 이 아이들의 삶은 이어진다- 무척 강하게 체감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후'가 삭막하기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이길 바랬고 석진 트릿과 석준 필립은 그 개인적인 바람에 참 많이 가까웠던 형제였다 해둘까.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와야 할 아이들이니 멀지 않은 그 언젠가에 지금 모두의 손에 어깨에 걸린 오펀스 에코백이 해지기 전에 이 페어 형제로 꼭 다시 와주길. 그 때의 게임은 또 어떤 모습이 될지.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면서.

Posted by 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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