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예종 연출가 프로젝트 낭독 공연
여기, 피화당 본공기원 내용 극호 배우일부 불호
* 2021/12/13 00:17  최초 작성
 
[시놉시스 소개]

 

병자호란이 휩쓸고 간 황폐한 조선. 암울한 백성들의 삶을 달래주는 건 한 달에 한 번 씩 판매되는 찌라시 소설 '피화당 이야기.' 선비 최후량은 현실을 통쾌하지만 담담하게 비판하는 소설의 내용에 반해 작가를 찾아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찾았지만 왜인지 동굴에 숨어서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작가. 선비 후량은 조선의 현실과 아픔을 담은 글이 후대까지 남을 수 있도록 책의 집필을 제안하는데…
 
캐스트 랑연(박가은비) 조훈(최후량) 강연정(계화) 이한별(매화) 이찬렬(황강아지)
 
 
연출가 과정을 낭독 공연만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 신청했었다. 이전에 다른 낭독이나 리딩에서 폭탄을 워낙 많이 밟아본 터라 큰 기대도 안 했고.
 
그러나, 이 작품은 반드시 본공으로 만나고 싶다, 한 시간 이십 분 만에 그런 마음이 되게 하는 게 가능했었고 참 기쁜 경험으로 남았다. 좋은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그 결과를 이 제작진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서 후기로 확장해두었던 글 재정리했다.
 
본공 오면 바뀌어 있을, 더 나아지고 늘어났을 부분들을 같이 기다려줄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참 좋겠지.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아쉬운 부분은 배우 관련 사항이라 마지막에 적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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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내용 풀기 전에 미리 말해둬야 할 것들을 정리하자면. 이야기 자체는 액자 형식이고 피화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작자 미상의 박씨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보니 액자 안의 내용으로 박씨전이 전개되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씨전을 사전 숙지하면 아주 좋다. 상세 내용을 잊어버린 터라 공연 직전에 인터넷 검색해서 다시 한 번 읽어봐둔 게 개인적으로는 무척 유용했었다.
 
초기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신묘한 능력이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조선 시대에 존재했다는 게 지금 보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그리고 박씨전의 주인공이 활약하는 시대가 병자호란 때이고, 패배와 굴욕으로 남겨진 실제의 역사와는 달리 박씨전 안에서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영웅들이 나오지.
 
어라.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는 대체 누가 썼고 어떻게 후대까지 남겨졌을까. 누가 보든 허구임이 확실한 이야기에 상상으로 끼워넣는 대체 역사가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액자를 두를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액자틀의 기본 형태는 예상이 되지만 이 틀의 가장 주된 재료가 병자호란 때 공녀로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이들, 환향녀다. 이들이 돌아왔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여성들을 감싸안아주기는 커녕- (후 잠시 감정을 다스리고) 이 내용이 넘버 두 개 다음에 확 들어오는데 박씨전을 감싼 외곽의 틀은 정말 조심스러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루어질 만한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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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양 저자거리 어딘가에서 시작된다. 한 달에 한 번 피화당이라는 이름으로 짧은 글이 판매되지. 그걸 줄서서 사는 이가 있고. 이 친구가 최후량의 하인인 황강아지. 목소리 두툼한 판매원(한별 매화가 목소리 두껍게 내며 남자인 척)이 줄을 세워 글을 팔고. 황강아지는 최후량이 글을 가르쳐서 언문을 읽을 줄 알고 최후량의 놀이 친구이기도 해서 같이 소설을 읽으며 주고받고 연기도 하고 잘 논다. 최후량은 백수가 체질인 건 맞아 보이는데 바깥으로 돌면서 풍류가무를 즐기는 한량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머리 디밀고 끼어보는 인물에 가까워 보였고 현재 이 사람의 관심사는 피화당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재미있어 죽겠다나. 양반님네 비판하고 풍자하고 조롱하는 거 보면 작가가 벼슬해 본 남자 아니겠냐- 같은 추측도 열심히 하면서 미지의 작가를 궁금해한다. 아주 가벼운 호기심으로 세상을 부유하는 인물.
 
한쪽에서는 저자에 나가 글을 팔고 온 이를 맞아주는 다른 여인들이 있다. 배경이 없다 보니 동굴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이 숨어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드러난다. 돈을 벌만한 수단이 별로 없어서 글을 쓰게 되었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방식이라는 점을 살짝 드러낸다.
 
재미있는 글에 감탄하던 최후량은 즐기기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가님과의 팬미팅!을 외치며 이야기 중에 언급된 연꽃의 뿌리에 검은 진흙이 딸려 나오는 곳이 어디더라? 단서를 찾아 길을 나서고. 여기서 황강아지와 최후량이 넘버 주고받는 게 판소리 풍. 뒤에서 바이올린이 열심히 피치카토로 가야금 치고 있었는데 서양 악기로 동양의 북과 장구 가야금 효과를 내는 효과 흥미로워서 악기 소리 들릴 때마다 주목했었다. 본공에서도 서양 악기를 사용한다면 악기들이 무대에 노출되어도 좋지 않을까.
 
최후량들이 찾아낸 사람들은 산 속 깊은 곳 동굴 어딘가에 숨어사는 여인들. 작가가 맞는지 확인하려 드는 낯선 남자들을 무서워할 수 밖에. 최후량이 상당히 신사적인 인물이긴 하나 세상에서는 딱히 필요하지 않은 자 취급을 받는 터라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확인하긴 하지만 여기에서 이들을 맞는 건 계화라는 하녀 아이 뿐이야. 소설 속 단서를 찾아 오다가 이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온 거였나 아무튼. '작가를 찾아온 이유'를 알려달라는 목소리에 최후량이 했던 답이 정확한 대사로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쪽이었으니. '세상에 버려진 사람 의미없는 사람은 없다'는 걸 작가님이 알려준다고. 최후량도 숙부에게 입적되었으나 숙부가 늦둥이를 보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얘기를 하고. 최후량은 작가의 글이 너무나도 아깝다며 긴 글을 쓰고 세상에 남기자는 제안을 남긴다.
 
최후량이 돌아간 다음 이 세 여인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사는 이유가 드러나는데 어린 계화를 통해서. 홍제원에서 밤에 몇 번이고 몸을 씻는 계화. 순간 깜짝. 설마 이거? 청에 공녀로 끌려갔던 부녀자들이 조선에 돌아왔을 때 받았던 수모와 모욕. 그들이 스스로 몸을 팔았던 것이 아님에도 겪어야 했던 일들. 살아있는 자들은 자신이 숨쉰다는 사실조차 드러내면 안 되어서 토굴에 은신하다 보니 할 수 있는 일도 삯바느질 정도로 제한되었고 부상을 입어도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 초 하나 제대로 켤 수 없을만큼 곤란해진 생계를 위해 셋 중 지체높은 양반님네 아가씨였고 세도가에게 시집을 갔음에도 청에 공녀로 끌려간 박가은비가 친정에도 시댁에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다른 여인들과 숨어 살며 붓을 잡고 글을 썼던 것. 이런 속사정을 최후량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도 가은비가 박씨전의 초고를 잡고 일 주일에 한 번 씩 이들의 은신처에 찾아오는 최후량 일행이 식량을 가져다주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부분만큼 만담으로 이어 지니 여기에서 최후량이 박씨 부인의 남편인 시백의 연기를 하다가 질색팔색을 하고 (싫어할만한 인물임) 원작 박씨전에는 없던 내용인 박색의 허물을 벗어낸 박씨부인에게 '시백이 깊게 사죄한다'는 대목을 이 리딩 작품의 작가가 추가해 넣어두긴 했고 바로바로 아닌 인물 튕겨내는 최후량 깨인 자라 다행이긴 하다. 피화당이라는 이름도, 박씨 부인이 흉한 외모로 인해 남편에게 소박맞아 지내는 별당의 명칭이니까.
 
계화는 이야기 속에서 박씨 부인의 시녀이지만 동시에 무예가. 공녀로 갔다가 결국 약혼이 파기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는 가족들의 폭언을 기억 속에서 드러내는 매화는 설중매로(박씨전 중에서는 적국의 공주이긴 하지만) 각자의 역할을 해낸다. 그렇게 두어 대목 정도는 평화롭게 박씨전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흘러 간다. 그 사이 황강아지가 계화와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다보니 최후량이 알지 못하는 이 여인들의 사정을 알고 있고 가은비의 생일에 딸을 잊지 못하는 부모님이 해마다 차려내는 생일잔치상의 음식을 받아 사연을 말하지 않은 채 여인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갈비찜 속 두릅은 어린 시절 야채를 먹지 않던 가은비를 챙겨 먹이려던 부모님들의 배려였는데 이게 여전히 반찬 속에 남아 있었고.
 
가은비의 부모처럼 가족의 귀환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이들이 정작 집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서 환향녀들은 조선땅으로 와서도 사람들에게 쫓기고 외면당하고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채 결국은 검푸른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이들이 대다수라 했다. 그 배척은 다수의 정서가 되다 보니 이들이 숨어있던 동굴 부근 마을의 누군가가 최후량의 뒤를 쫓아 환향녀들이 사는 곳을 알아내 덮치고. 급하게 도망치다 보니 상처 가득한 채로 추운 곳까지 쫓겨 가는 세 여인들.
 
천신만고 끝에 최후량이 찾아와 이제는 전후 사정도 알게 되지만 여기서 가은비가 매화가 계화가 절규하는 말들은. 다시 되새겨봐도 속상하고 억장 무너지는 내용. 어떤 내용인지는 말 안 해도 짐작이 되겠다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검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내용을 반복하며 유사한 가사가 거듭 사용된 부분이라 본공가면서는 개선되어주길 바랬고.
 
이들에게도 남은 건 죽음 뿐일까. 더 이상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았을까. 박씨전을 완성해달라는 최후량의 부탁은 너무나도 이상론적이긴 하다만.
 
그러나, 계화가 '이야기 속에서는 강한 나로 남고 싶다'고 '아프지 않은 내가 되고 싶다고' 가은비의 이야기가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매화와 계화의 바람이 담긴 말에 잠깐 사이에 이야기에 잠겨버려 울고 싶어졌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지금 여기가 엉망이라도 어딘가에서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잘 살아내는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박씨전이 터무니없는 선녀 영웅담이고 현실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 났다 해도 그 이야기 속의 그녀들이 어설픈 설정 위에 서 있음에도 얼마나 강하고 멋지고 아름다운지.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진 건' 이 여성들이 아니었는데 정작 피해자가 되어야 했고 모진 비난에 스러지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말로 끌려가야 했던 여성들을 보호해주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아프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재 시제. 그 옛날,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으면 정절을 지킨 것이라 말하던 위선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박씨전에서 이들도 잡아서 족쳐주지. (환장)
 
박씨전의 이야기가 이들의 뒤로 완결까지 이어져 나가고-(프로젝트 영상으로 글줄이 뿌려진다) 가은비와 계화 매화 세 사람은 환향녀들이 모여사는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최후량과 황강아지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박씨전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후량에게 남긴다. 작가를 가은비로 하겠느냐는 말에 모두의 이야기, 그러니까 '작자 미상'으로 해달라는 가은비의 마지막 말이 그대로 마음에 꽂히면서 극극호로 마무리.
 
리딩 끝나고 다시 읽는 박씨전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 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시험에서도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넘어갔던 이전의 기억도 있는데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 다른 살을 붙여서 좋은 꿈을 꾸게 해 주었구나.
 
나는 극극호를 찍었다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향녀 이야기를 가볍게 다룬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을테고 왜 이걸 닫힌 듯 열린 결말,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찬 이야기로 만들었느냐- 도 짚을 수 있는 면이 될테지만 박씨전으로 기운냈었을 전쟁 이후 사람들의 마음에 조금 더 닿고 싶어졌다. 그리고 혼자 보기 너무나도 아까웠으니까 살 붙이고 배경 더한 본공이 반드시 찾아와주기를. 극 중에서 공간 바뀌고 의상 교체하고 시간이 흐르는 건 어떤 식으로 채워올지 정말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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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웠던 건 배우 별 호불호 갈렸다는 부분. 이 공연으로 한별 매화/ 찬렬 황강아지 처음 봤는데 둘 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무대에서 자주 봅시다. 연정 배우가 가은비의 몸종인 계화로 나오면서 약간 어린 소녀의 어투를 쓰길래 왜 어린 역할을? 했더니만 그 짧은 리딩에서 대사 하나 낼 때마다 이 인물의 pre-history를 다 짐작할 수 있게 해주어서 결국은 호로 돌아섰다. 숨어사는 와중에도 몰래 나와 홍제원 개울에서 밤마다 몸을 씻으며 눈물 흘리는 소녀에서 한 번 울컥하고 이야기 속의 나는 강해지고 싶다고- 박씨전의 계화는 일당백 무사니까 부분에서는 진짜 엉엉 울 뻔 했었다. 내가 아닌 내가 이야기 속에서 강하고 굳세고 모든 것을 이겨내기를 그 마음 내 마음 객석에서 계화를 가은비를 매화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 랑연 가은비는 사극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못 해본 터라 대감님댁 아가씨 예상보다 괜찮았지만 리딩에서 대본을 보면서도 대사 씹으면 어카나 했고 가은비 넘버 중 하나 마지막에 내지르는 게 있는데 이걸 악보 피치대로 가지는 못해서 아쉬웠다. 이 곡을 부른 현재까지는 유일한 캐스트인데 이 배우에게 맞추기 위해서라면 한 음이나 두 음 내려 파워 최대한 채워서 배우 역량 최대로 뿜어내는 장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많이 아쉬웠던 건 조훈. 초반부 최후량 대사 중 극중극을 하며 작가를 추적해가는 넘버에서 극중극 속 선비와 최후량을 오가는 부분이 잘 구별되지 않아서 이 부분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 전 부분 넘버도 황강아지와 만담을 주고받으며 짧은 글을 구연해야 하는 형식인데 내용이 귀에 이해될만큼 들어오지 않았었다. 뒷부분에서도 한 장면 국어책 읽었고. 박씨전의 남주(…) 시백이란 인물이 워낙 개차반이라 구연하다 말고 한 번 씩 뚝뚝 끊으며 나 얘 싫어 ㅠㅠ 하는 표현과 자까님! 찾아가는 팬심 보이는 장면들은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이 성격이 배우가 그려낸 최후량이라는 인물에 착붙어서 마음에 들었었고. 그렇지만 리딩의 경우 배경과 소품이 극단적으로 제어된 환경이다 보니 배우가 호흡을 얼마나 잘 끊어서 장면을 구성하는가가 무척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해준 만큼 배우의 호흡 조절을 통한 극의 긴장감을 밀어내는 데에는 어느 정도는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해 보인다. 이건 새롭게 깨달은 지점.

 

Posted by 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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